여행/생생문화재탐방

경북 문경 근암서원 탐방

가든라이프 2015. 8. 21. 23:10

경상북도 문경 이곳은 산수가 좋고 아름다와 누구나 한번 이곳을 방문하면 잊지 못하고 다시 찾는 고장이며 더러는 이곳 풍광과 인심에 빠져 귀농 귀촌을 결심하고 아예 눌러 살기로 작정하는 이들도 많은 정말 산자 수명한 고장으로 수석과 오미자 사과등 특산물이 많이 생산되는 곳

오늘은 그곳에 있는 근암서원을 찾았다.

 근암서원의 인문학 아카데미 "청대 권상일의 생애와 사상"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 문화재 안에서 풍류를 즐겨가며 강의를 듣는 것

2차선 도로옆에 아담한 마을이 있고 그 한복판에 근암서원이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천자문과 공자 맹자의 글을 익히며 암송하는 낭낭한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

 마당에 들어서니 우리보다 먼저온 분들 차량이 한 대여섯대 되는가 싶기에 강좌는 열었지만 사람들은 많지 않은가부다라는 생각도 잠시 연이어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서며 주차장을 이내 꽉 메운다.

 관계자분에게 몇명이나 수강을 할 계획이냐 물으니 한 사오십명 정도 평균 수강을 하는 편이며 마련해둔 자리가 빌 틈이 없다는 귀띰

 종래에는 문화재 보존한다며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행여 훼손될까 걱정되어 출입을 엄히 통제하던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말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에서 우리의 문화를 배우고 익히며 함께 느낀다는 이 프로그램 너무 좋은것 같다.

 수강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더니 정말 빈자리가 없이 꽉 들어차고 중년부터 90세 가까운 어르신까지 청대 권상일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인문학 강의를 듣고자 숨을 죽인다.

  건물은 고택이지만 강의는 최신식 인터넷을 띄워놓고 빔프로젝트를 활용해서 강의를 하니 참 아이너리하네?

 강의 내용도 충실하고 무엇보다도 원근을 마다않고 찾아온 수강생들의 진지한 수강태도와 세태에 구분없이 배움의 열기로 인하여 창문을 모두 열고 시원한 들판을 굽어보며 강좌를 함에도 뜨거운 열기로 인해 문화재가 다 녹아 내리지 않을까 걱정을 해본다. ㅎㅎ

 

 

근암서원 입구 안내 현수막과 함께 청대 권상일의 일생에 대한 강좌를 들으러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근암서원의 유래에 대해 자세히 안내를 해주고 있었네요

 

강좌 강당 손님맞이로 분주한 주최측

 

강당뒤편에 모셔진 사당

 

찾는 이들에 대한 따스한 배려 차와 간단한 간식꺼리를 비치해놓고 있었음

 

서당 앞에는 손세정제 등을 비치해 위생에도 신경을 쓰고 있네요 

 

입교생들의 간단한 자기소개서 작성 및 교재

 

입교생들 모습

 

방송국에서도 취재차 나왔네요?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수강생 들

 

 

 

청대 권상일은 고려 태사공 권행의 후손이며 안동의 이계촌에서 세거하다 고조 권익린이 예천의 지금곡으로 이거했고 증조 권구가 다시 근암촌으로 이거함으로써 상주 사람이 되었다.

  청대는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근암리에서 태어났으며 7세부터 학업을 시작햇고 한햇동안 사략 7권을 독파할만큼 천부적 재능을 보였다.

 19세때 진사 김가주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나 1706년 3월에 혼인한 지 채 10년도 되지않아 사별하는 아픔을 가졌다.

 이후 여주이씨 이만영의 딸을 재취로 맞으면서 1710년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득남의 기쁨을 누렸으며 동년 6월 문과에 합격하는 겹경사를 맞게된다.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지냈으며1718년에는 전적, 1719년에는 직강, 1720년에는 예조정랑, 1722년에는 별조좌랑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벼슬보다 후학양성등에 힘써 안동 병산서원에서 강론을 펼치고 상주 도남서원에서 성리대전을 강론했고 상주목사 송인명과 심경, 근사록을 강론하는 등 토론문화를 이끌며 지역의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다.1727년에는 만경현령 외직에 임명되자 흉년이 들어 민생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음에도 애민정신과 학문을 증진시켰으며 1731년에 조정에서 영광군수로 임명했지만 부친상중이라 부임하지 않았고 동년 8월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자 여러번 사직 상소를 올리며 부임을 미루던 중 상부의 지시에 의해 마지못해 12월에 입시하였으나 한달후인 1732년 정월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해 가을 영남유림의 선망인 도산서원 원장에 선임되어 원유들과 함께 퇴계언행통록의 범례를 의정했고 이를 교정하는 등 유림시사로까지의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이후 정부로부터 많은 벼슬이 주어졌지만 대부분 사양하고 1735년 4월 울산부사에 부임하여 직무를 살폈으며 구강서운 건립과 객사에 강회를 개설하였으며 이후 사임하고 부석사를 유람하고 백운동서원을 심원하며 비교적 한적하게 지내다가 1740년 존도서와를 건립하여 학문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게된다.

 1747년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올라 동부승지 형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1748년 우부승지에 임명되어 봉직하였으며 1759년 81세를 일기로 작고하셨으며 1790년에의 僖靖의 시호를 조정에서 내림으로써 나라에서 인정하는 명관이 되었으며 "마음을 작게 가지고 공손하고 삼갔으며, 너그럽고 편안하게 아름다운 종말을 맞은 사람" 이라는 것이 시주의 요점이었다.(문경시.근망서원운영위원회 책자에서 발췌)